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66

영화 <The Straight Story> 속 느린 여정, 시간의 무게, 리얼리즘 데이비드 린치의 (1999)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가장 진실한 영화로 남아 있다. 초현실적 이미지와 불안의 미학으로 유명한 린치가 이번에는 ‘진짜 이야기(The Straight Story)’를 바탕으로, 한 노인의 느리고 고요한 여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 알빈 스트레이트(Alvin Straight)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73세의 노인이 병으로 쓰러진 형을 만나기 위해 잔디 깎기용 트랙터를 타고 미국 중서부를 가로질러 500킬로미터를 달린다. 자동차 면허도, 돈도, 젊음도 없지만, 그는 굳이 트랙터에 올라 그 길을 떠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인생의 무게, 인간의 존엄, 그리고 가족의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린치는 초자연적인 기호와 잔혹한 폭력을 .. 2025. 10. 14.
영화 <Taste of Cherry> 속 삶과 죽음 사이, 침묵의 대화, 영화적 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997)는 영화사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깊은 질문을 던진 작품이다. 이란 독립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키아로스타미는, 거대한 사건 대신 미세한 움직임과 사유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바디 씨(호마윤 에르샤디)는 자신의 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중년 남자다. 그는 테헤란 근교의 황량한 언덕을 자동차로 떠돌며, 자신이 자살한 뒤 시신을 묻어줄 사람을 찾는다. 영화는 이 간단한 여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묻는다. 인물의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음악도 없다. 키아로스타미는 침묵과 여백을 통해 관객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만든다. 는 인간의 고독과 구원, 그리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극도로 절제된 .. 2025. 10. 13.
영화 <The Celebration> : 가족의 축제, 도그마 95, 인간의 얼굴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덴마크 원제: Festen, 1998)은 유럽 영화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으로, ‘도그마 95’ 운동의 첫 번째 공식 영화이자 1990년대 후반 독립영화의 상징적 전환점이다. 영화는 겉으로는 가족의 생일 파티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폭력과 위선, 억눌린 진실을 폭로하는 서늘한 드라마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울리히 톰센)은 아버지 헬게의 60번째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 저택으로 돌아온다. 온 가족이 모인 만찬 자리에서 그는 느닷없이 축하 연설 대신 충격적인 폭로를 한다. 어린 시절, 자신과 쌍둥이 여동생 린다가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고백이다. 순간 축제의 분위기는 얼어붙고, 가족들은 진실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침묵을 거부한다. 그는 반.. 2025. 10. 13.
영화 <Claire Dolan> 도시 속의 고립, 몸의 언어, 구원 없는 자유 로지 케리건의 (1998)은 냉정하고 정제된 시선으로 인간의 고독과 자아의 해체를 탐구하는 1990년대 독립영화의 숨은 걸작이다. 영화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내면이 어떻게 침묵 속에서 무너지고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 하는가를 잔혹할 정도로 차분히 그린다. 주인공 클레어(카트린 카르)는 고급 매춘부로 살아가며, 겉으로는 세련되고 완벽하게 통제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상처와 결핍,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과거의 빚 때문에 자신을 착취하는 포주 롘(Roland, 콜므 포리오)을 떠나지 못한 채, 매일 같은 호텔방과 차 안, 고객의 집을 오가며 살아간다. 케리건은 이 인물을 ‘희생자’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클레어를 철저히 통제된 주체로 묘사하며.. 2025. 10. 12.
영화 <Crash> : 기술과 욕망의 결합, 신체의 재구성, 금기의 미학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1996)는 인간의 욕망과 기술의 결합이 어떤 윤리적 경계를 넘을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자동차 사고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의 집단을 그리며, 인간의 본능과 문명의 진보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탐구한다. 주인공 제임스(제임스 스페이더)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 같은 사고로 다친 여성 헬렌(홀리 헌터)과의 만남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성적 욕망에 눈을 뜬다. 그는 점차 ‘자동차 충돌’이라는 폭력적 행위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비밀스러운 집단에 끌려 들어간다. 영화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한 형태의 성적 교감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기술적 체계와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감각’ 임을 암시한다. 크로넨버그는 를 통해 인간의.. 2025. 10. 12.
영화 <Slacker> 이야기 없는 이야기, 세대의 초상, 자유의 아이러니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1990)는 1990년대 미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통해 한 세대의 정체성과 철학을 탐구한다. 텍사스 오스틴의 거리를 배경으로, 링클레이터는 10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24시간의 일상을 이어 붙인다. 각 인물은 몇 분만 등장하고 사라지며, 서로의 이야기는 거의 연결되지 않는다. 사건도, 주인공도, 결말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 ‘없음’ 속에서 오히려 풍부한 의미를 창조한다. 링클레이터는 ‘슬래커(Slacker)’라 불리던 90년대 청년들의 무기력함과 지적 방황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 그들은 일하지 않고,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으며,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이 영.. 202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