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Zero>(2009)는 일본 독립영화의 정수이자, 존재의 철학을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감독 기요하라 유키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한다. 영화는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젊은 여성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녀의 이름은 나오(直). 나오의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감각’에 시달린다. 영화의 제목 ‘제로’는 바로 이 공허함의 상징이다. 기요하라 유키는 이 공허를 ‘부정적인 상태’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무에서 시작되는 가능성’으로 해석한다. 나오가 기억을 잃은 이유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그녀가 지나가는 공간과 풍경을 따라간다. 오래된 철길, 낡은 다다미방, 빛이 스며드는 문틈 — 이 모든 사물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호흡한다. 감독은 대사보다 정적을, 이야기보다 이미지의 시간을 택한다. 관객은 점점 서사의 외형을 잃고, 존재의 감각 속으로 빠져든다. <Zero>는 그렇게 ‘이야기 없는 영화’의 미학을 완성한다.
영화 <Zero> 속 무(無)에서 시작된 존재의 감각
기요하라 유키는 인간의 존재를 ‘무로부터의 출발’로 바라본다. 영화 초반, 나오가 깨어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먼지가 떠다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관객은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그 이유는 카메라의 리듬 때문이다. 감독은 긴 정지 쇼트를 통해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그대로 체험하게 만든다. 나오의 시선이 머무는 사물, 예를 들어 찻잔 위의 물결, 창틀의 그림자, 빛에 반사된 먼지 입자 등이 모두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다. 감독은 이 정물적인 세계 속에서 ‘존재의 첫 숨’을 포착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속에서도 모든 것이 일어난다. <Zero>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영화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감각이 남는다. 그리고 그 감각 속에서 관객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낀다. 영화의 제목이 ‘제로’인 이유는, 모든 존재가 결국 무(無)로 돌아가지만, 그 무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요하라 유키는 아무것도 없는 것 속에서 가장 순수한 생의 리듬을 찾아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철학이다.
시간의 흐름, 기억의 흔적
<Zero>는 기억을 잃은 한 여성을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한다. 나오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그것은 원처럼 돌고, 반복되며, 때로는 멈춘다. 감독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비선형적 편집을 사용한다. 같은 장면이 다른 빛, 다른 계절, 다른 감정 속에서 반복된다. 예를 들어, 나오가 강가에서 돌을 던지는 장면은 세 번 등장한다. 그러나 매번 그 의미가 다르다. 처음에는 무의식적 행위였지만, 두 번째는 기억의 파편을 찾는 시도이며, 마지막에는 삶을 수용하는 행위가 된다. 이처럼 시간은 감정의 변화를 따라 순환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오가 오래된 필름 사진을 현상하는 시퀀스다.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이미지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빛으로 새겨진 기억의 조각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남는다. 기요하라 유키는 이 장면을 통해 ‘기억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Zero>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잃고, 다시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왜냐하면 망각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의 기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그 질문은 곧 존재의 질문이다.
정적 속의 깨달음, 일본적 미학의 완성
<Zero>는 일본 독립영화가 가진 ‘정적의 미학’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대사와 사건을 최소화하고, 감정의 변화를 빛과 소리로만 표현한다. 영화의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신, 바람의 소리, 물의 흐름, 발자국의 마찰음이 감정의 대사를 대신한다. 감독은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내면을 감각으로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연출은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향 아래 있지만, 기요하라 유키만의 시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녀의 카메라는 ‘응시’의 미학을 따른다. 인물을 바라보되,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민이 아니라 존중이다. 나오가 강 위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그 정점이다. 해가 지고, 물 위에 비친 빛이 서서히 사라질 때,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는다. 대신, ‘존재하는 지금’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Zero>가 말하는 구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영화는 이 단순한 진리를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관객의 마음속에는 묘한 평온이 찾아온다. 그것은 명상 후의 정적과도 같다. <Zero>는 일본 독립영화의 본질 — 느림, 침묵, 존재의 성찰 — 을 완벽히 체화한 작품이다.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은 결국 ‘제로’로 돌아가지만, 그 제로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의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