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의 <The King of Comedy>(1982)는 폭력이나 범죄 대신 ‘명성에 대한 집착’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병리학적 심리를 드러낸 영화다. 이 작품은 <Taxi Driver> 이후 스코세이지가 다시 한번 ‘외로운 남성의 광기’를 탐구한 영화이지만, 이번에는 총이 아니라 마이크를 들었다. 주인공 루퍼트 퍼프킨(로버트 드 니로)은 무명 코미디언으로, 유명 토크쇼 진행자 제리 랭포드(제리 루이스)를 숭배한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TV에 출연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것이라고 믿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아무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조차 그를 비웃는다. 그러던 어느 날, 루퍼트는 제리에게 접근하려다 실패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를 납치해 자신의 쇼를 강제로 방송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는 이 과정을 블랙코미디로 포장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섬뜩한 현실이 있다. 스코세이지는 이 작품을 통해 1980년대 미국 사회의 ‘명성 중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루퍼트는 폭력적이지 않지만, 그의 집착은 총보다 위험하다. 그는 ‘유명해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The King of Comedy>는 그렇게 ‘현대인의 자기기만’을 웃음 속에서 드러낸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관객들이 그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영화는 오히려 예언처럼 현실이 되어버렸다. 유튜버, 인플루언서, SNS 스타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루퍼트 퍼프킨은 더 이상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 자신이다.
영화 <The King of Comedy> 속 명성의 환상
루퍼트 퍼프킨은 스스로를 ‘코미디의 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무대에 선 적이 없다. 그의 코미디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 채, 유명인들의 삶을 모방한다. 그의 집 벽에는 TV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들이 붙어 있고, 마치 이미 스타가 된 것처럼 포즈를 취한다. 이 장면은 슬프면서도 섬뜩하다. 스코세이지는 이 인물을 통해 ‘명성의 허상’을 폭로한다. 루퍼트는 재능보다 이미지를, 실체보다 인정을 갈망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웃겼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유명한가’에 집착한다. 그의 환상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1980년대 미국은 텔레비전 문화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화면 속에서 살았고,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 곧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루퍼트는 그 신화를 맹신한다. 그는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자, 명성의 환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곧 파멸이다. 스코세이지는 이 환상을 비판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인간의 본능으로 본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존재하고 싶어 한다. 루퍼트는 그 욕망의 극단이다. 그는 사회가 만들어낸 ‘성공의 신화’를 맹목적으로 좇는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무렵, 우리는 깨닫는다. 루퍼트는 어쩌면 성공했다는 사실을. 그의 범죄는 실제로 방송되었고,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된다. 이 아이러니는 섬뜩하다. 영화는 질문한다 —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인가, 재능인가? 아니면 주목받는가?” 스코세이지는 답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거울을 건넨다. 그 거울 속에는 루퍼트의 얼굴이 있고, 동시에 우리의 얼굴이 있다.
현대인의 고독
<The King of Comedy>는 웃음 뒤에 숨은 외로움의 영화다. 루퍼트는 세상 누구보다 ‘관심’을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철저히 고립된 인물이다. 그는 부모와도, 친구와도, 사회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가 유일하게 관계를 맺는 대상은 텔레비전이다. 제리 랭포드는 그에게 신이자, 아버지이며, 유일한 친구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일방적이다. 루퍼트는 제리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어 하지만, 제리는 그를 귀찮은 팬으로만 여긴다. 이 일방적 관계는 현대인의 소통 단절을 상징한다. 스코세이지는 도시의 냉기를 배경으로 루퍼트의 외로움을 그린다. 뉴욕의 거리는 붐비지만,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는다. 루퍼트의 목소리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고, 그의 웃음은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가 코미디언을 꿈꾸는 이유는 단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소속’을 원한다. 웃음을 통해 사랑받고 싶고,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단절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루퍼트가 제리를 납치하는 장면조차 폭력적이라기보다 슬프다. 그는 진심으로 제리와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를 미치광이로 몰아간다. 스코세이지는 그 비극을 ‘웃음’으로 포장한다. 웃음은 방어기제다. 우리는 루퍼트를 비웃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그의 외로움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그것은 도시를 사는 모든 현대인의 초상이다. <The King of Comedy>는 그래서 공포보다 더 슬픈 영화다. 총이 아닌 마이크를 든 루퍼트는, 세상에 들리지 않는 외침을 반복한다. “나도 여기 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끝내 환호성으로 바뀌지 않는다. 스코세이지는 그 침묵을 가장 큰 비극으로 남긴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현실과 망상’을 완전히 구분하지 않는 연출이다. 루퍼트의 환상 장면들은 현실과 거의 동일하게 찍혔고, 관객은 어느 순간 그것이 실제인지 망상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스코세이지는 이 혼란을 의도했다. 그는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환상을 통해 ‘현대인의 인식 왜곡’을 시각화한다. 루퍼트가 쇼에 출연해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장면은, 처음에는 환상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끝에서는 실제로 방송된다. 관객은 마지막까지 질문하게 된다 — “그는 진짜로 성공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꿈속에 있는가?” 스코세이지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루퍼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 표정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오직 ‘확신’만 있다. 그는 자신이 진짜 코미디의 왕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대 사회는 이미 진실보다 ‘믿음’이 우선되는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코세이지는 여기서 예언자가 된다. <The King of Comedy>는 40년 후 SNS 시대를 정확히 예견했다.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며,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노출’이다. 루퍼트의 광기는 오늘날 수많은 자기 홍보와 과시의 문화 속에서 되살아났다. 영화는 마지막에 아이러니한 결론을 제시한다 — ‘미친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이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비극이다. 스코세이지는 이 작품을 통해 ‘명성의 민주화’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는, 동시에 누구나 현실을 잃어버릴 수 있는 시대다. 루퍼트 퍼프킨은 더 이상 희극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비웃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의 무대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