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Taste of Cherry>(1997)는 영화사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깊은 질문을 던진 작품이다. 이란 독립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키아로스타미는, 거대한 사건 대신 미세한 움직임과 사유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바디 씨(호마윤 에르샤디)는 자신의 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중년 남자다. 그는 테헤란 근교의 황량한 언덕을 자동차로 떠돌며, 자신이 자살한 뒤 시신을 묻어줄 사람을 찾는다. 영화는 이 간단한 여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묻는다. 인물의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음악도 없다. 키아로스타미는 침묵과 여백을 통해 관객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만든다. <Taste of Cherry>는 인간의 고독과 구원, 그리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극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삶의 가능성에 대한 가장 따뜻한 찬가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는 질문만 던질 뿐, 어떤 대답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철학적 명상처럼 남는다. 관객은 언덕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진동, 먼지, 빛의 변화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영화는 대화보다 침묵으로 말하며, 그 침묵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진실한 언어임을 보여준다.
영화 <Taste of Cherry> 속 삶과 죽음 사이의 길 위에서
<Taste of Cherry>는 ‘길’ 위의 영화다. 바디 씨는 낡은 랜드로버를 타고 황량한 언덕을 오르내린다. 그는 한 사람씩 태워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제안한다. “내가 내일 이곳에서 죽어 있을 테니, 아침에 와서 확인한 뒤 흙을 덮어 달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군인, 학생, 신학도, 노동자 —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바디의 제안을 거절한다. 영화는 그 만남들의 반복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두려움과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바디의 목적지는 죽음이지만, 그의 여정은 역설적으로 ‘삶’을 향하고 있다. 언덕의 길을 오르내리는 반복적인 움직임은 인생의 순환 구조를 상징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를 차 안에 고정하고, 대화의 리듬을 길의 흔들림과 겹친다. 대화의 중간중간 삽입되는 풍경 — 먼지에 덮인 산, 황톳빛 하늘, 나무 한 그루 — 는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미학은 바로 이 ‘비움의 서사’에 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관객은 도로의 굴곡과 인물의 표정에서 점차 내면의 변화를 감지한다. 바디 씨는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타인의 말을 듣고, 그들의 삶을 스친다. 그것이 곧 ‘삶’ 그 자체이다.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에게 묻는다 —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어야 할 이유는 있는가?” <Taste of Cherry>는 그 질문을 던진 채, 대답을 유보한다. 그 유보 속에서 영화는 더욱 깊어진다.
침묵의 대화, 존재의 울림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대화’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Taste of Cherry>에서 바디 씨는 세 명의 인물과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눈다. 첫 번째는 젊은 군인이다. 그는 불안에 떨며 바디의 제안을 거절하고 달아난다. 두 번째는 종교학교 학생이다. 그는 자살이 신의 뜻에 어긋난다며 설득하려 하지만, 바디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 번째는 박물학자인 늙은 남자이다. 그는 한때 자살을 결심했지만, 결국 삶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체리에 입을 대자 그 맛이 너무 달았어요.” 이 짧은 대사가 영화의 핵심이다. 그것은 삶의 철학이자, 키아로스타미의 시적 선언이다. 인생은 체리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그 단맛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바로 그 미세한 감정의 진동을 포착한다. 바디와 노인의 대화는 겉으로는 일상적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숨어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두 사람의 얼굴 대신 창문 너머의 풍경을 비춘다. 마치 자연이 대화의 제3의 인물처럼 끼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바디는 언덕 위의 구덩이에 누워 눈을 감는다. 번개가 치고, 화면은 어둠 속으로 잠긴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대신 카메라는 새벽의 빛 속으로 전환된다. 군인들이 언덕을 오르고, 바람이 불고, 풀잎이 흔들린다. 그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영화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키아로스타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형식이다. 침묵 속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생명은 숨 쉰다. 그것이 <Taste of Cherry>의 가장 큰 울림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적 시(詩)
<Taste of Cherry>는 영화이자 시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미지와 리듬,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통해 ‘영화적 시학’을 완성했다. 그의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하늘의 빛과 땅의 질감, 먼지와 바람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이 미학은 ‘보여주되 말하지 않는다’는 이란 시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에게 의미를 제공하지 않고, 스스로 발견하게 만든다. 영화의 리듬은 느리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것은 명상과 같다. 한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이어질 때마다, 관객은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경험을 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필름이 비디오 포맷으로 전환되며, 카메라가 촬영 현장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순간 중 하나다. 감독 자신이 카메라 뒤에서 등장하고, 배우들이 웃으며 흡연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이것은 영화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이것이 바로 삶이다’라는 역설을 남긴다. 키아로스타미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 삶과 죽음, 현실과 예술, 진실과 허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Taste of Cherry>는 단순히 자살을 주제로 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시적 선언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삶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삶이 얼마나 덧없고도 찬란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조용한 확신이야말로,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