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슈레이더의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1985)는 전통적인 전기영화의 모든 규칙을 거부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 작가의 일대기를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파괴하는지를 탐구하는 시적 실험이다. 영화는 유키오 미시마의 생애 마지막 날, 1970년 11월 25일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는 자위대 본부에서 연설을 마친 뒤 할복자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건을 단순히 비극으로 다루지 않는다. 슈레이더는 미시마의 세 편의 소설 — <금각사>, <용의 폭풍>, <행복한 꿈의 집> — 을 영화 속에 삽입해, 현실과 허구를 병렬적으로 전개한다. 현실 파트는 흑백으로, 소설 파트는 강렬한 색채로 표현되어 ‘삶과 예술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대비한다. 이 구성은 마치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듯 정교하다. 미시마는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인간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한다. 그는 ‘아름다움은 죽음 속에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생애를 하나의 작품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슈레이더는 이 영화에서 미시마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미시마의 언어와 시각적 상징을 통해 관객이 그 내면의 긴장을 체험하게 만든다. 금빛으로 빛나는 사원, 붉은 장막, 날카로운 칼, 하얀 군복. 이 모든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며, 미시마의 정신을 구성하는 상징체계를 이룬다. <Mishima>는 인간이 예술 속에 자신을 완전히 투영할 때 어떤 파국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영화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
슈레이더는 이 영화에서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철저히 해체한다. 미시마는 문학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만, 결국 현실의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언어와 상징으로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 세계는 결코 현실과 합쳐질 수 없다. 영화의 흑백 장면은 현실의 미시마를, 컬러 장면은 그의 상상과 문학을 나타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세계의 구분은 점점 사라진다. 예술의 세계가 현실로 침투하고, 현실이 예술의 언어로 변한다. 미시마는 “나는 내 몸을 통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 그에게 예술은 추상이 아니라 육체의 연장이다. 그는 글을 통해 정신을 정화하지만, 동시에 그 글이 그를 현실로부터 분리시킨다. 슈레이더는 이 모순을 철저히 시각화한다. 그는 인물의 내면을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내면을 ‘공간’으로 변환한다. 붉은 무대 위에서 인물이 천천히 움직이는 장면은 마치 연극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실존적 고통이 녹아 있다. 영화는 미시마의 내면이 만들어낸 무대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로 자신을 구원하려 할 때 맞닥뜨리는 한계다. 슈레이더는 말한다. “예술은 현실을 닮으려 하지만, 결국 그 현실을 파괴한다.” 미시마는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서 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신을 대체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 글에 삼켜진다. <Mishima>의 시각적 구조는 그를 감싸는 감옥이다. 예술은 그의 탈출구이자, 동시에 감금의 형태다.
자기 파괴의 미학
유키오 미시마의 삶은 ‘자기 파괴의 미학’으로 요약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완벽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예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예술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예술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영화 속에서 미시마는 ‘육체 훈련’에 집착한다. 그는 매일같이 근육을 단련하며, 몸을 조각처럼 다듬는다. 그의 몸은 신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품이다. 그는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나 육체를 통해 진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자신을 파괴한다. 슈레이더는 이 과정을 신비롭고 동시에 공포스럽게 연출한다. 미시마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장면, 햇빛 아래 반짝이는 칼날,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 그 이미지들은 강박적이지만 아름답다. 필립 글라스의 음악은 이 장면을 명상처럼 감싼다. 반복되는 피아노 리듬은 미시마의 강박과 완벽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예술과 육체, 정신과 폭력의 경계에서 자신을 소모한다. 슈레이더는 미시마의 파괴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예술의 순수한 형태로 바라본다. 미시마의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완성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실현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죽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 문장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슈레이더는 이 파괴적 신념을 통해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낸다. <Mishima>는 그래서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한 예술영화다.
죽음의 의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 자위대 본부의 테라스다. 미시마는 연설을 한다. “일본은 영혼을 잃었다. 행동이 없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조롱당하고, 군인들은 웃는다. 그 순간 미시마는 칼을 꺼내 들어 자신의 배를 가른다. 그것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의례’다. 그는 죽음을 통해 현실과 예술을 통합하려 한다. 그의 몸은 예술의 최종 형태이며, 피는 잉크처럼 흩어진다. 슈레이더는 이 장면을 극도로 절제된 미장센으로 연출한다. 화면은 붉게 물들고,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감정의 폭발은 없다. 오히려 정적이다. 죽음은 폭력이 아니라, 완성의 순간으로 묘사된다. 슈레이더는 이 의례를 통해 ‘서구적 합리성’과 ‘동양적 미학’의 충돌을 보여준다. 미시마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일본 전통의 명예 개념을 결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 두 세계의 경계에서 갈라졌다. 그의 죽음은 그 갈등의 종결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그는 완벽을 추구했지만, 결국 완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칼날이 몸을 가를 때, 우리는 그가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마지막 인간임을 깨닫는다. 슈레이더는 그 죽음을 찬양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관찰한다. 그리고 묻는다.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남는다.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예술로 만든 작품이다. 그 미학적 완결성과 형식적 실험은 지금도 영화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시적 선언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