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r Doll>(2009)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인형이라는 비인간적 존재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탐구한 독립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 사회의 외로움과 감정의 결핍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척하는 것’의 차이를 묻는다. 주인공 노조미(배두나)는 성인용 공기인형이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스스로 의식을 갖게 되고, 인간의 세계로 걸어 나온다. 그녀는 거리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랑을 배우고, 슬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은 인간의 모방일 뿐이다. 그녀는 인간처럼 느끼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진짜 인간이 아님을 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모순된 존재의식에서 출발한다. 고레에다는 <Air Doll>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비어 있는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형이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는 곧 ‘감정을 잃어버린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피상적인 관계 위에 서 있는지를 차가운 시선으로 포착한다. 도심의 소음, 네온사인, 그리고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 모두가 살아 있으나, 동시에 죽은 듯한 세상이다. 노조미는 그 세계 속에서 사랑을 배우지만, 그 사랑은 결국 파괴로 끝난다. 고레에다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 존재의 슬픔을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그려낸다. 그것은 삶의 허무를 말하는 동시에, 그 허무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찾는 시도이기도 하다.
영화 <Air Doll> 속 공허 속의 탄생, 존재의 자각
<Air Doll>의 시작은 일상적이지만, 동시에 섬뜩하다. 노조미는 매일 밤 주인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인형이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 안에는 공기가 아닌 ‘의식’이 채워진다. 그녀는 처음으로 거울을 보고, 세상을 본다. 이 장면은 고레에다가 인간의 ‘존재의 자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 역시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동시에 외로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노조미는 처음으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본다. 모두 살아 있지만,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레에다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기계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인간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곧 깨닫는다. 인간도 사실은 자신처럼 ‘공기인형’ 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감정을 흉내 내고, 사랑을 소비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척하지만, 그 안은 비어 있다. 노조미는 점점 인간과 닮아가지만, 동시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의 순수한 감정은 인간 사회의 피로와 냉소 속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고레에다는 이 과정을 통해 ‘존재의 자각’이란 곧 ‘외로움의 탄생’ 임을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상과 분리된다. 노조미의 첫걸음은 단순한 인형의 각성이 아니라, 존재 철학의 출발점이다.
감정을 배우는 인형, 인간을 비추다
노조미는 인간 사회로 들어와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감정을 모방한다. 웃는 법, 인사하는 법, 사랑하는 법까지. 그러나 그녀가 배운 감정은 언제나 ‘흉내’ 일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를 진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새로운 자극’으로서의 노조미를 사랑한다. 결국 그 사랑은 파국으로 끝난다. 노조미는 깨닫는다. 인간의 감정이란, 순수함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결핍과 이기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고레에다는 이 부분에서 인간의 허무를 철저히 해부한다. 인형이 감정을 배운다는 설정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풍자가 있다. 인간이야말로 감정을 잃은 인형이다. 고레에다는 인간 사회가 어떻게 감정을 소비하고, 관계를 소모하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영화 속 도쿄의 거리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그들 사이에는 진짜 연결이 없다. 모두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각자의 공허를 감춘다. 노조미는 그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관찰자’로서 바라본다. 그녀는 인간이 가진 외로움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 외로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인간의 잔혹함을 더 선명히 본다. 고레에다는 이를 통해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슬프면서도 따뜻한 이유다.
삶의 외로움, 인간이라는 공기
<Air Doll>은 제목 그대로 ‘공기’의 영화다.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인간의 삶 역시 그렇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완전히 연결되지는 못한다. 고레에다는 이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공기인형’이라는 은유로 표현한다. 노조미는 마지막에 자신의 몸이 공기로 채워져 있음을 자각한다. 그녀는 인간처럼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받았지만, 결국은 ‘비어 있는 존재’ 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의 진실’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공허 속에서 사랑하고, 관계를 만들며, 의미를 찾는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조미는 스스로의 공기를 빼내며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몸은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그녀가 남긴 감정은 여전히 공간 속에 머문다. 고레에다는 이 장면을 통해 ‘존재의 흔적’이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국 사라지지만, 우리의 감정과 관계는 공기처럼 남아 세상에 흩어진다. 그것이 고레에다가 전하는 궁극의 메시지다. <Air Doll>은 인간의 외로움을 말하지만, 그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영화는 인간 존재에 대한 잔잔한 위로이자, 철학적 성찰의 정수다. 고레에다는 이 작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비어 있음도 살아 있음이다. 공허 속에도 따뜻한 숨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