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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fter Life> 속 삶의 편집실, 죽음 이후, 선택의 순간

by don1000 2025. 10. 25.

영화 &lt;After Life&gt; 속 삶의 편집실, 죽음 이후, 선택의 순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After Life>(1998)는 일본 독립영화사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 작품이다. 영화는 죽은 이들이 사후 세계로 가기 전, 단 한 가지 ‘기억’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 ‘기억의 선택’이라는 아이디어는 단순히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장치다.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고레에다는 그 답을 ‘기억’에서 찾는다. 영화 속 ‘중간역(中間驛)’ 같은 공간에는 다양한 연령과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한 주 동안 자신이 생전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혹은 가장 의미 있었던 장면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촬영되어, 사후의 세계로 가지고 가는 유일한 영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기억의 영화’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고레에다가 실제 인터뷰 형식으로 비전문 배우들의 진짜 기억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멘터리적 접근은 영화 전체를 리얼리티와 초현실 사이의 경계에 세운다. <After Life>는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일상의 대화로 끌어내며, 관객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바람소리를,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또 누군가는 단순한 밥 한 끼의 시간을 선택한다. 이 평범한 기억들은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다. 고레에다는 영화의 형식과 주제를 완벽히 일치시킨다. 죽은 자들이 ‘기억의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은 곧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메타적 질문이 된다. 이 작품은 단지 사후 세계를 상상한 판타지가 아니라, 영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기억의 영화, 삶의 편집실

영화 속 공간은 마치 편집실 같다. 죽은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기억을 영화로 재현하기 위해 ‘직원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 직원들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로, 여전히 이곳에서 다른 이들의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만드는 ‘기억의 영화’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종종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고, 조명은 흔들리며, 배경은 종이로 만든 세트일 뿐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상 속에서 선택된 이는 진심으로 만족하며 미소 짓는다. 이 장면에서 고레에다는 ‘기억의 불완전함’이 오히려 인간성을 구성한다는 철학을 제시한다.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느낌’과 ‘온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점점 ‘삶의 편집실’로 변한다. 감독은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편집자다.” 기억은 선택되고, 편집되고, 재조합된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정의한다. 이는 곧 영화 제작의 과정과 닮아 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화이며, 죽음은 그 편집이 끝나는 순간이다. 고레에다는 그 경계를 부드럽게 흐리며,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After Life>는 그 어떤 초자연적 요소보다도, ‘기억의 진실성’을 통해 감동을 준다. 카메라와 편집기, 필름의 물성이 살아 있는 이 작품은 영화의 본질이 인간의 ‘감정의 기록’임을 다시 일깨운다.

죽음 이후의 현실주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사후 세계를 환상적이거나 종교적 공간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After Life>는 극도로 현실적이다. 사무실 같은 공간, 커피를 내리는 장면, 종이벽과 낡은 의자 — 이 모든 요소들은 관객에게 익숙한 현실감을 준다. 고레에다는 죽음마저 일상의 연장선으로 표현한다. 그는 초현실적 비주얼보다, 인물들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사후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축한다. 이 영화의 미학은 ‘현실적인 사후 세계’라는 역설 위에 서 있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망설인다고 말한다. 그곳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 오직 ‘기억을 선택해야 하는 인간’만이 존재한다. 이 단순한 설정은 놀라운 철학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특히, 극 중 한 중년 남성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는 아무 기억도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하며, 직원과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살아생전 사랑했던 아내의 기억을 떠올리고,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레에다는 그 장면을 통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해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의 카메라는 인물의 눈빛을 천천히 따라가며, 한 인간이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의 울림을 포착한다. <After Life>의 리얼리즘은 감정의 진실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음악적 강조도 없다. 대신, 아주 조용한 대사 한마디와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관객은 자신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고레에다의 세계는 그렇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죽음’을 그려낸다.

존재의 의미, 선택의 순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직원 중 한 명이 자신 또한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죽은 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는 타인의 기억을 기록하며,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이 장면은 <After Life>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 ‘타인의 기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한다’ — 를 집약한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고레에다는 이 철학적 개념을 서정적으로 시각화한다. 한 사람의 기억이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선택 장면에서, 각 인물은 자신이 선택한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진다. 이때 화면은 서서히 하얗게 빛나며, 마치 필름이 타들어가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것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완성의 순간’이다. 삶은 기억으로 닫히고, 영화는 그 기억을 영원히 보존한다. 고레에다는 이 과정을 통해 ‘영화’와 ‘삶’의 관계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순간을 지나치지만, 단 한 장면만이 우리를 대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장면일까? 그는 관객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 <After Life>는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영화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 열린 결말이야말로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한 이유다. 죽음, 기억, 존재 — 이 세 단어가 만들어내는 철학적 조화 속에서 고레에다는 인간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되돌린다. 그가 보여주는 ‘기억의 온기’는 결국 영화라는 예술의 존재 이유와도 겹친다. 인간은 결국 사라지지만,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 기억을 다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After Life>는 인간의 존재를 기록하는 가장 따뜻한 형태의 예술이다. 그것이 바로 고레에다의 진정한 마법이다.